아침 7시에!! 모여 출발했습니다.
아침을 거른 관계로 휴게소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었습니다.
여기는 천안-논산 고속도로에 있는 정안휴게소입니다.
비가와서 운전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광주까지는 4시간반정도 걸렸습니다.
그래도 예상보다 비가 많이는 안와서 다행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운전대를 잡아 약간 긴장한 모습의 최기사.. ㅋㅋ
이건 뒷자리에 앉은 현진이가 찍은 바깥사진..
11시반쯤 전남대에 도착했습니다.
전남대에 5.18기념관이 있더군요.. 우연히 발견해서 관람하기로 결정~^^
음.. 카메라 촛점이 영~
이것두 영.. 기념관 입구입니다.
전남대학교 정문입니다. 여기서부터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읽었습니다.

거의 같은 무렵에 전남대 정문 앞에는 학생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일요일이라서 도서관에 간다든가 학교에 두고 왔던 가방을 챙기러 간다거나, 또는 휴교령에 대처했던 학생회의 결정에 응하여 10시에 학교 정문 앞에 모여 보자는 기대감을 가지고 왔던 터였다. 교문에는 육군부대의 분대 편제인 공수대원 1개팀 8,9명이 완전무장을 갖춘 채 버티고 서서 학교에 들어갈 수 없으니 각자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학생들은 주위에서 배회하면서 쉽사리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10시가 넘어서자 모여든 학생들이 100여명이나 되었고, 그들 사이에서는 불만 섞인 말들이 튀어나왔다. 한마디씩 터지는 불만의 말들은 무리 사이에 반향을 일으키면서 여태껏 개개인에게 깊이 자리잡았던 공포감들이 천천히 가셔지고 있었다. 학생들이 차츰 불어나자 공수부대 중대장은 직접 정문의 다리 앞에까지 나와 메가폰을 들고 귀가를 종용했지만 그럴수록 맞받는 학생들의 불만도 커졌고 군중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다리 부근에 모여 앉아 농성을 하기 시작했다. 50여명 정도가 다리 위에 앉아 노래를 부르며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고, 나머지 학생들은 주위에 웅성거리며 서 있었다. 차츰 불어난 학생들은 200~300명 쯤이었는데 그들은 과감하게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계엄해제'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군 물러가라' '휴교령 철회하라'는 구호들이 튀어나왔다. 대치중이던 공수부대 책임자가 앞으로 나와서, 만약 즉시 해산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해산시켜 버리겠다고 위협하자 학생들은 더욱 크게 노래를 불렀다. 갑자기 "돌격 앞으로"하는 명령과 함께 공수대원들이 으악 소리를 내지르며 학생들 사이로 파고들면서 곤봉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학생들도 처음에는 약간 저항을 했으나 그들은 경찰들과는 달랐다. 공수대원들의 곤봉은 쇠심이 박힌 살상용의 특수 곤봉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살기가 돌았고 가차없이 머리를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몇 명의 학생들이 피를 쏟으면서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학생들의 무리는 순식간에 7, 8명의 공수대원들에게 밀려 골목으로 숨어 버렸다. 학생들은 다시 무리지어 길 모퉁이로 나아가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잠깐 동안 투석전이 계속되고 나서 공수대원들은 과감하게 앞으로 진격해 나왔다. 그들은 돌이 날아와도 피하지 않고 달려들어 끝까지 한 사람만 쫓아가서 곤봉으로 머리를 강타했고 실신하면 질질 끌고 가곤 했다. 반 시간쯤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폭동 진압훈련과 게릴라 특수훈련을 받은 최강의 공수부대와 맨손으로 싸운다는 것은 학생들로서는 무리였다. 두세명의 학생들이 선두에 나서서 비조직적인 군중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대열을 지휘하던 학생들은 여기서 계속 싸운다면 자신들의 피해만 계속 늘어갈 뿐이라고 판단하고, 시내로 나가 시민들에게 알려야 한다면서 흩어지는 학생들에게 광주역에 재집결하라고 외쳤다.
- 35~37쪽 (5월 18일 항쟁 1일째)
전남대 정문에서 출발해 광주역으로 향했습니다.
정문에서 500미터가량 쭉 직진하면 철길이 나오는데 굴다리를 지나 좌회전해서 다시 600여미터를 직진하면 광주역이 나옵니다.
여기서 다시 책을 꺼냈습니다.
위의 전남대 정문앞 이야기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이리저리 흩어졌던 학생들은 둘셋씩 짝을 지어 광주에서는 신역이라고 부르는 광주 역전 광장에서 전열을 다시 가다듬었다. 그들은 방금 겪고 빠져나온 사실에 치를 떨면서 한시라도 빨리 시민들에게 폭력의 진상과 전두환 일당의 만행을 폭로하여 군사쿠데타의 음모를 분쇄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다시 대오를 정비한 3,4백 명의 학생들은 우선 금남로 도청 앞 광장을 목표로 나아가기로 결정하고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을 거쳐서 금남로의 가톨릭 센터 앞에까지 행진해 나아갔다.
- 37쪽(5월 18일 항쟁 1일째)
우리의 순례 일정은 위에서 학생들이 행진한 경로를 따라 공용터미널, 금남로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잠시, 광주역에서 있었던 항쟁기록을 짚고 넘어갈까 합니다.
순례할때는 같이 읽지는 못했지만 광주역은 도청앞과 함께 광주항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일어났던 곳입니다. 책에서 몇 부분을 인용해봅니다.
이날 심야에서 새벽까지의 신역 전투는 초저녁의 금남로 전투와 마찬가지로 많은 선량한 인명이 살상된 치열한 전투였고, 도청을 제외한 시내 전역에서 계엄군을 퇴각하게 하였던 결정적인 전투였다. 이곳을 지키던 계엄군의 방어는 필사적이었다. 광주역은 도청과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행정적 기능을 유지시킬 수 있는 상징적인 장소였고, 전략적으로도 고속도로가 차단될 가능성이 있는 현상황에서 병력과 보급품 수송을 위한 중요한 거점이었다. 신역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5갈래의 방사형 도로에는 곳곳마다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었고 시위 군중들의 공격은 파상적으로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공용터미널에서 광주역으로 향하는 모퉁이의 주유소에서는 한 청년이 트럭에다 드럼통 2개를 싣고 휘발유를 가득 채워서 불을 붙인 뒤에 광주역을 향하여 질주해 나갔다. 시간은 밤 10시 30분이었다. 청년이 계엄군 전방 20여미터쯤에서 밖으로 뛰어내리자 트럭은 그대로 불덩이가 된 채로 돌진하여 바리케이트를 부수고 역전 앞 분수대를 들이 받았다. 휘발유 드럼통이 주위를 진동하며 폭발했고 불기둥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광주역을 중심으로 시청 방향에서도 이와 똑같은 돌격이 몇 번이나 감행되었다. 수많은 차량이 분수대 주변에서 폭파되거나 불에 타고 있었다. 밀려드는 시민들에게 공포로 위협하던 계엄군은 더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M16 소총을 발사하기 시작했고, 투석하던 시민들이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 100쪽(5월 20일 항쟁 3일째)
새벽 2시경에 버스 한 대를 선두로 전춘심이 가두방송을 계속하며 나아가고 그 뒤로 2천여명의 시위대가 행진하여 양동 복개상가를 거쳐 광주천변을 따라 내려가 일직방식, 전남방직, 무등경기장을 경유하여 광주역으로 집결했고 광주역에서는 이 응원군으로 더욱 사기가 충전하게 되었다. 여기서 다시 시민들의 일부는 차량에 올라타고 시 외곽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시민들을 신역 부근으로 집결시켰다. 공수대의 발포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밀려드는 시위대의 필사적인 공격은 새벽 4시경 계엄군을 신역에서 격퇴시켰다. 시민들은 태극기를 휘두르며 역사로 진격했다. 그들은 시체를 뛰어넘으면서 함성을 질렀다.
"이겼다, 우리가 공수부대를 몰아냈다!"
- 102쪽(5월 20일 항쟁 3일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