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20일 수요일

미리가본 장항습지(SBS스페셜)

이번 토요일 한강하구에 있는 장항습지를 비롯하여 한강운하 예정지를 기행합니다.

검색해보니 SBS에서 장항습지를 소개했더군요.. 미리 장항습지에 가본듯합니다.


서해바다와 만나는 한강하구.
2006년에 한강하구 6개 지역이 습지 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내륙에 위치한 곳이 바로 장항습지랍니다.


장합습지는 김포대교와 일산대교 사이에 있는데요.. 원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고 1988년에 신곡수중보가 생기면서 퇴적물이 쌓여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아래 장항습지의 입구 모습입니다.


장항습지에는 많은 동식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먼저 100여마리의 고라니가 살고 있다네요. 우리나라 최대의 고라니 서식지랍니다.

새끼와 같이 다니는 고라니도 보입니다. 먹을 것이 풍부한데다가 군사지역이라 사람들의 왕래도 없어서 겁이 많은 고라니들도 안심하고 새끼를 기른다고 합니다.


이어서 고라니의 먹이가 되는 풍부한 식물들이 소개됩니다.


장합습지는 버드나무 군락으로 유명합니다.
버드나무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배출하는 량이 다른 나무들에 비해 훨씬 우수한데..
장항습지에서 배출하는 산소의 양이 남산의 무려 6배나 된다는군요.
서울의 허파라고 불릴 만 하죠? ^^


버드나무와 같이 공생하는 말똥게입니다.


장항습지에는 40여종의 철새가 찾아온답니다.


한강은 하구둑이 없습니다. 바다와 만나는 하구가 막혀있지 않은 것이죠.
그래서 바닷물과 강물이 섞이고 염도에 따라 다양한 생물이 살고 있답니다.
이런 곳을 기수역이라고 한다네요.


이렇게 다양한 생명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곳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 서울환경연합에서 한달에 2번씩 한강운하 답사를 가더라고요. 저도 이번주말에 갑니다.
  거리도 가까우니 시간들 내셔서 가보세요~

2009년 5월 18일 월요일

2009 광주순례, 황석영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와 함께(2)

광주역을 출발하여 당시 학생들의 행진 경로를 따라갔습니다.

광주역을 중심으로 5개의 도로가 방사형으로 펼쳐져있는데.. 그 중 10시방향의 도로를 따라 1키로미터 정도 쭉 직진을 하면 대인교차로라는 곳이 나옵니다.
이 오거리에 지금도 지하보도가 있는데 여기가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된 곳입니다.
  공용터미널 지하도 속으로 쫓겨갔던 시민들은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두컴컴한 지하도 속에서 공수대원들 멋대로의 요리가 되어 숨져갔다. 여기서 죽은 대부분의 사망자가 자상에 의한 것이었고, 거의 두세 군데의 상처가 있었다. 아마도 마구 닥치는 대로 찔렀을 것이다. 공용터미널 사무실까지 몰려들어간 병사들은 여러 방을 뒤져 안내양들을 끌고 가는 등, 그들의 살륙은 이십분 동안 완벽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 72쪽, 5월 19일 항쟁 2일째
지하보도를 지나서 금남로 쪽으로 나오면 롯데백화점이 있습니다. 바로 이 부근이 당시 공용터미널이 있던 자리입니다. 항쟁기간중 많은 충돌이 벌어졌던 곳입니다.
여기선 사진을 찍지 못했네요.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는 중에 시민은 삼천여 명으로 늘어났고, 갑자기 금남로 쪽의 광남로를 따라서 공수부대를 실은 군용트럭 10여대가 들이닥쳤다. 공수대는 시위대의 후면 공용터미널 로타리 부근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공수대원 쪽에서도 흩어지면 시위 군중들에게 포위되어 죽음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는 좀처럼 군중 속으로 깊숙이 추격하지는 못하고 1개 소대 혹은 중대 규모로 열을 지어 다가왔다. 그들은 시위대가 흩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갑자기 방독면을 쓰더니 최루탄을 수없이 쏘아댔다. 시위대는 주변 골목으로 흩어지기도 하고 바로 옆 공용터미널 빌딩 3층 옥상에 올라가 돌을 던지기도 했다. (...중략...)
  로타리 부근 전투에서 머리가 으깨지고 팔이 부러져 온통 피범벅이 된 부상자를 급히 병원으로 이송중이던 택시 기사에게 공수대원이 부상자를 내려 놓으라고 명령했다. 기사는 안타깝게 "당신이 보다시피 지금 곧 죽어가는 사람을 병원으로 운반해야 되지 않겠느냐"라고 호소하자 그 공수대원은 차의 유리창을 부수고 운전기사를 끌어내려 대검으로 무참하게 배를 찔러 살해했다. 이런 식으로 최소 3명의 운전사가 살해당했는데, 이는 다음날인 20일, 또 하나의 기폭제였던 '차량 시위'의 직접적 계기가 된다.
- 70~72쪽, 5월 19일 항쟁 2일째
다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이제 금남로로 접어들었습니다.
금남로 5가에서 도청쪽으로 5백여미터를 걸으면 사거리가 나오는데.. 여기가 금남로와 중앙로가 교차되는 곳입니다.
사진을 보면 도로표지판에 '천변로'라고 쓰여져 있는데.. 그 밑에 '중앙로'라는 표시가 보일 것입니다.

  10시 40분부터 경찰은 적극적으로 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최루탄을 쏘지 시작했고, 산발적으로 시민들의 투석이 시작되었다. 시민들은 최루탄 가스가 자욱해지면 부근 골목의 주택가나 상가에 숨었다가 잠시 후 다시 몰려들기를 거듭했다. 군중은 차츰 격렬해지고 있었다. (...중략...)
  청년들이 근처의 중앙로 지하상가 공사장에서 각목과 철근, 파이프 따위를 가져다 자체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경찰과 시민의 충돌이 시작된 지 30분 지나서 군용트럭 30여 대에 분승한 공수부대가 도청앞과 광남로 사거리에 진출하여 시위 군중을 포위, 압축하기 시작했다. 투입된 공수대의 진압은 시위 군중의 불안감을 넘어서 잔인성을 보였다. 그들은 마치 며칠 굶겨 놓은 맹수가 먹음직한 고깃덩어리를 발견한 것처럼 시위대를 덮쳤다.
  공수대원들은 정면에서 돌멩이가 날아와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으면서 돌진해왔다. 곤봉과 총 개머리판, 대검으로 때리고 휘두르고 찌르면서 시위대의 중심부로 파고든 공수대는 그들의 위장군복마저 피로 벌겋게 물들였다.
  시민들은 수많은 희생자를 도로 위에 남겨놓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은 공수대의 잘 훈련된 조직적 폭력에 밀려 골목마다 숨어들어 일반 주택가나 다방, 사무실, 상점 등지로 피신했지만 공수대의 살륙은 어제와 마찬가지 양상으로 되풀이되었다.
  공수대원들은 아무 집이나 문을 박차고 들어가 젊은 사람이면 남녀를 불문하고 곤봉으로 난타질하고는 길바닥으로 질질 끌고 나왔다. 붙잡힌 사람이 자신은 시위에 가담하지도 않았는데 왜 이러느냐는 식으로 항의라도 할라치면 그에게는 즉시 허벅지나 옆구리에 대검을 쑤셔 버렸다.
- 56~59쪽, 5월 19일 항쟁 2일째
우리는 금남로를 따라 계속 도청쪽으로 향했습니다. 
얼마 안 가 가톨릭센터 앞에 도착했습니다.


금남로를 따라 계속 걷습니다.
도청이 얼마 안남은 지점에서 건너편에 YMCA가 보입니다.

드디어 도청!
그런데.. 이게 웬일? 도청을 철거한다는 현수막이 붙어있습니다.

이곳을 철거한답니다.
1980년 5월, 그 피빛 절규를 기억하십니까?
이제 시민여러분께서 지켜주십시오.


29년전 항쟁의 자취를 더듬어가던 순례의 끝에서, 우리는 다시 냉정한 현실과 부딪히고 맙니다.
철거라니요.. 아마도 이곳을 철거하고 개발해서 이익을 남기기 위한 것이겠지요..
정말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2009 광주순례, 황석영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와 함께(1)

아침 7시에!! 모여 출발했습니다.
아침을 거른 관계로 휴게소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었습니다.

여기는 천안-논산 고속도로에 있는 정안휴게소입니다.

비가와서 운전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광주까지는 4시간반정도 걸렸습니다.

그래도 예상보다 비가 많이는 안와서 다행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운전대를 잡아 약간 긴장한 모습의 최기사.. ㅋㅋ

이건 뒷자리에 앉은 현진이가 찍은 바깥사진..

11시반쯤 전남대에 도착했습니다.
전남대에 5.18기념관이 있더군요.. 우연히 발견해서 관람하기로 결정~^^

음.. 카메라 촛점이 영~

이것두 영.. 기념관 입구입니다.

전남대학교 정문입니다. 여기서부터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읽었습니다.
  거의 같은 무렵에 전남대 정문 앞에는 학생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일요일이라서 도서관에 간다든가 학교에 두고 왔던 가방을 챙기러 간다거나, 또는 휴교령에 대처했던 학생회의 결정에 응하여 10시에 학교 정문 앞에 모여 보자는 기대감을 가지고 왔던 터였다. 교문에는 육군부대의 분대 편제인 공수대원 1개팀 8,9명이 완전무장을 갖춘 채 버티고 서서 학교에 들어갈 수 없으니 각자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학생들은 주위에서 배회하면서 쉽사리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10시가 넘어서자 모여든 학생들이 100여명이나 되었고, 그들 사이에서는 불만 섞인 말들이 튀어나왔다. 한마디씩 터지는 불만의 말들은 무리 사이에 반향을 일으키면서 여태껏 개개인에게 깊이 자리잡았던 공포감들이 천천히 가셔지고 있었다. 학생들이 차츰 불어나자 공수부대 중대장은 직접 정문의 다리 앞에까지 나와 메가폰을 들고 귀가를 종용했지만 그럴수록 맞받는 학생들의 불만도 커졌고 군중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다리 부근에 모여 앉아 농성을 하기 시작했다. 50여명 정도가 다리 위에 앉아 노래를 부르며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고, 나머지 학생들은 주위에 웅성거리며 서 있었다. 차츰 불어난 학생들은 200~300명 쯤이었는데 그들은 과감하게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계엄해제'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군 물러가라' '휴교령 철회하라'는 구호들이 튀어나왔다. 대치중이던 공수부대 책임자가 앞으로 나와서, 만약 즉시 해산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해산시켜 버리겠다고 위협하자 학생들은 더욱 크게 노래를 불렀다. 갑자기 "돌격 앞으로"하는 명령과 함께 공수대원들이 으악 소리를 내지르며 학생들 사이로 파고들면서 곤봉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학생들도 처음에는 약간 저항을 했으나 그들은 경찰들과는 달랐다. 공수대원들의 곤봉은 쇠심이 박힌 살상용의 특수 곤봉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살기가 돌았고 가차없이 머리를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몇 명의 학생들이 피를 쏟으면서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학생들의 무리는 순식간에 7, 8명의 공수대원들에게 밀려 골목으로 숨어 버렸다. 학생들은 다시 무리지어 길 모퉁이로 나아가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잠깐 동안 투석전이 계속되고 나서 공수대원들은 과감하게 앞으로 진격해 나왔다. 그들은 돌이 날아와도 피하지 않고 달려들어 끝까지 한 사람만 쫓아가서 곤봉으로 머리를 강타했고 실신하면 질질 끌고 가곤 했다. 반 시간쯤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폭동 진압훈련과 게릴라 특수훈련을 받은 최강의 공수부대와 맨손으로 싸운다는 것은 학생들로서는 무리였다. 두세명의 학생들이 선두에 나서서 비조직적인 군중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대열을 지휘하던 학생들은 여기서 계속 싸운다면 자신들의 피해만 계속 늘어갈 뿐이라고 판단하고, 시내로 나가 시민들에게 알려야 한다면서 흩어지는 학생들에게 광주역에 재집결하라고 외쳤다.
- 35~37쪽 (5월 18일 항쟁 1일째)
전남대 정문에서 출발해 광주역으로 향했습니다. 
정문에서 500미터가량 쭉 직진하면 철길이 나오는데 굴다리를 지나 좌회전해서 다시 600여미터를 직진하면 광주역이 나옵니다.
여기서 다시 책을 꺼냈습니다.
위의 전남대 정문앞 이야기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이리저리 흩어졌던 학생들은 둘셋씩 짝을 지어 광주에서는 신역이라고 부르는 광주 역전 광장에서 전열을 다시 가다듬었다. 그들은 방금 겪고 빠져나온 사실에 치를 떨면서 한시라도 빨리 시민들에게 폭력의 진상과 전두환 일당의 만행을 폭로하여 군사쿠데타의 음모를 분쇄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다시 대오를 정비한 3,4백 명의 학생들은 우선 금남로 도청 앞 광장을 목표로 나아가기로 결정하고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을 거쳐서 금남로의 가톨릭 센터 앞에까지 행진해 나아갔다.
- 37쪽(5월 18일 항쟁 1일째)
우리의 순례 일정은 위에서 학생들이 행진한 경로를 따라 공용터미널, 금남로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잠시, 광주역에서 있었던 항쟁기록을 짚고 넘어갈까 합니다.
순례할때는 같이 읽지는 못했지만 광주역은 도청앞과 함께 광주항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일어났던 곳입니다. 책에서 몇 부분을 인용해봅니다.

  이날 심야에서 새벽까지의 신역 전투는 초저녁의 금남로 전투와 마찬가지로 많은 선량한 인명이 살상된 치열한 전투였고, 도청을 제외한 시내 전역에서 계엄군을 퇴각하게 하였던 결정적인 전투였다. 이곳을 지키던 계엄군의 방어는 필사적이었다. 광주역은 도청과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행정적 기능을 유지시킬 수 있는 상징적인 장소였고, 전략적으로도 고속도로가 차단될 가능성이 있는 현상황에서 병력과 보급품 수송을 위한 중요한 거점이었다. 신역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5갈래의 방사형 도로에는 곳곳마다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었고 시위 군중들의 공격은 파상적으로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공용터미널에서 광주역으로 향하는 모퉁이의 주유소에서는 한 청년이 트럭에다 드럼통 2개를 싣고 휘발유를 가득 채워서 불을 붙인 뒤에 광주역을 향하여 질주해 나갔다. 시간은 밤 10시 30분이었다. 청년이 계엄군 전방 20여미터쯤에서 밖으로 뛰어내리자 트럭은 그대로 불덩이가 된 채로 돌진하여 바리케이트를 부수고 역전 앞 분수대를 들이 받았다. 휘발유 드럼통이 주위를 진동하며 폭발했고 불기둥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광주역을 중심으로 시청 방향에서도 이와 똑같은 돌격이 몇 번이나 감행되었다. 수많은 차량이 분수대 주변에서 폭파되거나 불에 타고 있었다. 밀려드는 시민들에게 공포로 위협하던 계엄군은 더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M16 소총을 발사하기 시작했고, 투석하던 시민들이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 100쪽(5월 20일 항쟁 3일째)

  새벽 2시경에 버스 한 대를 선두로 전춘심이 가두방송을 계속하며 나아가고 그 뒤로 2천여명의 시위대가 행진하여 양동 복개상가를 거쳐 광주천변을 따라 내려가 일직방식, 전남방직, 무등경기장을 경유하여 광주역으로 집결했고 광주역에서는 이 응원군으로 더욱 사기가 충전하게 되었다. 여기서 다시 시민들의 일부는 차량에 올라타고 시 외곽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시민들을 신역 부근으로 집결시켰다. 공수대의 발포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밀려드는 시위대의 필사적인 공격은 새벽 4시경 계엄군을 신역에서 격퇴시켰다. 시민들은 태극기를 휘두르며 역사로 진격했다. 그들은 시체를 뛰어넘으면서 함성을 질렀다.
  "이겼다, 우리가 공수부대를 몰아냈다!"
- 102쪽(5월 20일 항쟁 3일째)

2009년 5월 9일 토요일

의료민영화도 결국 밀어부치려나 보군여


집에서 경향신문을 보는데.. 오늘 아침 신문을 받아 보니..

"의료 민영화 전단계, 지원회사 설립 허용" 이라는 탑기사가 떴더라고요..

참나.. 진짜 할려나보군요..

사실.. 한동안 의료민영화 <- 요거 좀 잊고 있었었는데..

4월에 '차별철폐대행진'이라는 행사가 있었는데 그때.. 서울대병원에 들렀었거든요..

근데 그때.. 노조분들이 서울대병원에서도 채권발행을 추진하려고 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 알게모르게.. 의료민영화가 추진되고 있구나.. 했죠..

촛불1주년이 무사히(?) 넘어가고 나니..

바로 밀어부치기 들어가나 봅니다.

"병원 채권 발행땐 의료비 인상 ‘보전’ 불가피 "(경향신문)

아.. 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