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역을 중심으로 5개의 도로가 방사형으로 펼쳐져있는데.. 그 중 10시방향의 도로를 따라 1키로미터 정도 쭉 직진을 하면 대인교차로라는 곳이 나옵니다.
이 오거리에 지금도 지하보도가 있는데 여기가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된 곳입니다.

공용터미널 지하도 속으로 쫓겨갔던 시민들은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두컴컴한 지하도 속에서 공수대원들 멋대로의 요리가 되어 숨져갔다. 여기서 죽은 대부분의 사망자가 자상에 의한 것이었고, 거의 두세 군데의 상처가 있었다. 아마도 마구 닥치는 대로 찔렀을 것이다. 공용터미널 사무실까지 몰려들어간 병사들은 여러 방을 뒤져 안내양들을 끌고 가는 등, 그들의 살륙은 이십분 동안 완벽하게 마무리가 되었다.지하보도를 지나서 금남로 쪽으로 나오면 롯데백화점이 있습니다. 바로 이 부근이 당시 공용터미널이 있던 자리입니다. 항쟁기간중 많은 충돌이 벌어졌던 곳입니다.
- 72쪽, 5월 19일 항쟁 2일째
여기선 사진을 찍지 못했네요.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는 중에 시민은 삼천여 명으로 늘어났고, 갑자기 금남로 쪽의 광남로를 따라서 공수부대를 실은 군용트럭 10여대가 들이닥쳤다. 공수대는 시위대의 후면 공용터미널 로타리 부근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공수대원 쪽에서도 흩어지면 시위 군중들에게 포위되어 죽음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는 좀처럼 군중 속으로 깊숙이 추격하지는 못하고 1개 소대 혹은 중대 규모로 열을 지어 다가왔다. 그들은 시위대가 흩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갑자기 방독면을 쓰더니 최루탄을 수없이 쏘아댔다. 시위대는 주변 골목으로 흩어지기도 하고 바로 옆 공용터미널 빌딩 3층 옥상에 올라가 돌을 던지기도 했다. (...중략...)다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이제 금남로로 접어들었습니다.
로타리 부근 전투에서 머리가 으깨지고 팔이 부러져 온통 피범벅이 된 부상자를 급히 병원으로 이송중이던 택시 기사에게 공수대원이 부상자를 내려 놓으라고 명령했다. 기사는 안타깝게 "당신이 보다시피 지금 곧 죽어가는 사람을 병원으로 운반해야 되지 않겠느냐"라고 호소하자 그 공수대원은 차의 유리창을 부수고 운전기사를 끌어내려 대검으로 무참하게 배를 찔러 살해했다. 이런 식으로 최소 3명의 운전사가 살해당했는데, 이는 다음날인 20일, 또 하나의 기폭제였던 '차량 시위'의 직접적 계기가 된다.
- 70~72쪽, 5월 19일 항쟁 2일째
금남로 5가에서 도청쪽으로 5백여미터를 걸으면 사거리가 나오는데.. 여기가 금남로와 중앙로가 교차되는 곳입니다.
사진을 보면 도로표지판에 '천변로'라고 쓰여져 있는데.. 그 밑에 '중앙로'라는 표시가 보일 것입니다.

10시 40분부터 경찰은 적극적으로 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최루탄을 쏘지 시작했고, 산발적으로 시민들의 투석이 시작되었다. 시민들은 최루탄 가스가 자욱해지면 부근 골목의 주택가나 상가에 숨었다가 잠시 후 다시 몰려들기를 거듭했다. 군중은 차츰 격렬해지고 있었다. (...중략...)우리는 금남로를 따라 계속 도청쪽으로 향했습니다.
청년들이 근처의 중앙로 지하상가 공사장에서 각목과 철근, 파이프 따위를 가져다 자체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경찰과 시민의 충돌이 시작된 지 30분 지나서 군용트럭 30여 대에 분승한 공수부대가 도청앞과 광남로 사거리에 진출하여 시위 군중을 포위, 압축하기 시작했다. 투입된 공수대의 진압은 시위 군중의 불안감을 넘어서 잔인성을 보였다. 그들은 마치 며칠 굶겨 놓은 맹수가 먹음직한 고깃덩어리를 발견한 것처럼 시위대를 덮쳤다.
공수대원들은 정면에서 돌멩이가 날아와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으면서 돌진해왔다. 곤봉과 총 개머리판, 대검으로 때리고 휘두르고 찌르면서 시위대의 중심부로 파고든 공수대는 그들의 위장군복마저 피로 벌겋게 물들였다.
시민들은 수많은 희생자를 도로 위에 남겨놓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은 공수대의 잘 훈련된 조직적 폭력에 밀려 골목마다 숨어들어 일반 주택가나 다방, 사무실, 상점 등지로 피신했지만 공수대의 살륙은 어제와 마찬가지 양상으로 되풀이되었다.
공수대원들은 아무 집이나 문을 박차고 들어가 젊은 사람이면 남녀를 불문하고 곤봉으로 난타질하고는 길바닥으로 질질 끌고 나왔다. 붙잡힌 사람이 자신은 시위에 가담하지도 않았는데 왜 이러느냐는 식으로 항의라도 할라치면 그에게는 즉시 허벅지나 옆구리에 대검을 쑤셔 버렸다.
- 56~59쪽, 5월 19일 항쟁 2일째
얼마 안 가 가톨릭센터 앞에 도착했습니다.

금남로를 따라 계속 걷습니다.
도청이 얼마 안남은 지점에서 건너편에 YMCA가 보입니다.

드디어 도청!
그런데.. 이게 웬일? 도청을 철거한다는 현수막이 붙어있습니다.
이곳을 철거한답니다.
1980년 5월, 그 피빛 절규를 기억하십니까?
이제 시민여러분께서 지켜주십시오.
1980년 5월, 그 피빛 절규를 기억하십니까?
이제 시민여러분께서 지켜주십시오.

29년전 항쟁의 자취를 더듬어가던 순례의 끝에서, 우리는 다시 냉정한 현실과 부딪히고 맙니다.
철거라니요.. 아마도 이곳을 철거하고 개발해서 이익을 남기기 위한 것이겠지요..
정말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trackback from: [도청사수]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답글삭제옛 도청 원형보존과 5월정신계승을 위한 촛불문화제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그냥 도청을 비워주게 되면 우리가 싸워온 그 동안의 투쟁은 헛수고가 되고, 수없이 죽어간 영령들과 역사 앞에 죄인이 됩니다. - 1980년 5월 27일 故 윤상원 열사의 마지막 연설 가운데서 15일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16일에도 하루종일 지루하게 내리고 있었다. 옛 전남도청에서 5·18민주광장과 분수대를 지나 금남로에 이를 즈음 작은 무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